수전 프라인켈 지음, 김승진 옮김, 을유문화사, 1만5000원

얼마 전부터 아주 서툰 솜씨로 망치질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공구 상자를 만들었고, 투박한 콘솔을 하나 짰으며, 아주 단순한 모양이긴 하지만 책상도 완성했다. 다음 작업은 의자가 될 텐데, 주변에서는 한결같이 ‘의자는 사서 써라.’ 한다. 플라스틱 의자의 편리함과 유려한 곡선미는 돈을 주고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입문자가 다루기에 나무는 지극히 불친절한 게 사실이다. 이 불편함과 비효율성을 견디고 언젠가 나무를 솜씨 있게 다뤄 이음새나 접합 없이 그저 단 하나의 덩어리만으로 이루어진 의자를 갖는 건 오래된 소망이지만 사실상 그러한 소망을 가장 손쉽게 실현시켜 줄 수 있는 소재는 나무가 아니라 단연코 플라스틱이라는 것을 안다.

수전 프라인켈의 『플라스틱 사회』의 한 구절을 보자.

“판톤은 이음새 없이 전체가 한 덩어리의 플라스틱으로 된 의자를 단 한 번의 공정으로 대량 생산한다는 도전에도 매료됐다. 판톤은 사출 성형 기계로 플라스틱 양동이 만드는 과정을 보고서 이 아이디어를 얻었다. 기계의 한쪽 끝에 플라스틱 알갱이를 넣으면 알갱이들이 빠르게 녹아서 고체가 되고 그것이 주형틀로 사출된 후 거기서 모양이 잡히고 식는 공정이었다. 판톤은 이 공정의 속도와 양동이의 낮은 가격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나무는 불가능하지만 플라스틱은 가능한 어떤 것이 있다. 플라스틱의 미학은 한 덩어리로 이루어진 완전체를 실현 가능하게 해주었다는 데에만 있는 게 아니다. 단순하고 빠른 제작 공정, 그리고 엄청나게 싼 가격, 자유로운 모방의 가능성까지를 모두 겸하고 있다는 점에서 엄청난 지위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열이나 압력으로 형상을 인공적으로 변형시킬 수 있는 고분자 물질 혹은 그것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을 이르는 말, 플라스틱. 단순하면서도 매우 유동적인 플라스틱의 이 특징은 곧 플라스틱의 거의 전부다.

“플라스틱 덕분에, 미국인들은 고를 수 있는 물건이 끊이지 않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새로운 제품과 새로운 특성이 쉼 없이 흘러나오면서, 이제 이런 상태가 정상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타파웨어, 포마이카 조리대, 노가하이드 인조가죽 의자, 붉은 아크릴 미등, 비닐 랩, 비닐 속지, 쥐어짜는 병, 누름단추, 바비인형, 라이크라 브래지어, 위플볼, 운동화, 유아용 컵 등이 마치 항상 존재해 왔던 것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현대 사회는 자연의 한계에서 인간을 해방하고, 자유로운 소비의 시대를 열어주며, 예술에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으리라는 플라스틱 시대의 약속과 함께 전진했는지도 모르겠다. 『플라스틱 사회』에는 8가지의 익숙한 플라스틱 제품이 등장한다. 위에서 인용한 부분은 각각 의자를 통해서 바라본 ‘플라스틱의 미학’, 상아 머리빗에서 플라스틱 머리빗으로의 전환이 의미하는 ‘소비의 대중화’의 일부다. 이 밖에도 일회용 라이터에서 버리는 문화의 단면을 이야기하고, 페트병의 사례에서 플라스틱 재활용의 성과와 한계를 언급한다. 신용카드의 사용을 통해 차세대 친환경 플라스틱 카드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부분도 흥미로운 읽을거리다.

사실상 플라스틱의 세상에서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새로운 문제는 더 이상 없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플라스틱의 시대는 너무 멀리 와버렸고, 더 이상 플라스틱 머리빗, 타파웨어, 바비인형, 유아용 컵, 볼펜, 컴퓨터 마우스, 페트병, 신용카드 따위가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플라스틱을 포기한다는 것은 어쩌면 소비를, 그리고 일상을 포기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결국 우리에게는 ‘플라스틱이냐 아니냐?’ 는 식의 질문이 아니라 ‘플라스틱과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질문이 남는다.

“자연의 한계에서 해방시켜 주고, 부를 민주화하며, 예술에 영감을 주고, 우리 스스로를 원하는 대로 바꾸어 낼 수 있다는” 플라스틱의 약속은 여전히 위력적이다. 그런 플라스틱에 이별을 고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쓰고 버리는 문화에 익숙해지고, 유해물질이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노출되며, 환경에 치명적인 온갖 증거 사례들 앞에서도, 사람들은 기꺼이 그 ‘유해’를 선택한다. 옳은 것들이 늘 선택받는 것은 아니다. 결국 플라스틱 앞에서 더 많은 상상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하거나 혹은 플라스틱을 덜 쓰는 방식의 느린 걸음으로 오래오래 답해야 하는 수밖에 없다.

P.S. 여전히 의자는 고민이다. 불편하고 비효율적이며 비용과 시간과 공력을 많이 들여야 하는 쪽은 여전히 미련을 갖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