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껍질·채소가 건강한 흙으로
“지렁이가 처음 집에 왔을 때보다 5mm 자랐어요.” 윤씨의 둘째 아들 준환(9)군은 아빠가 먹이를 줄 때마다 사진으로 지렁이의 생태 기록을 남긴다. <최명헌 기자 choi315@joongang.co.kr>
‘5월14일. 뚜껑을 들어올리자 지렁이들이 순식간에 흙속으로 쏙 들어갔다. 흙을 10cm 판 후 200g 정도의 상추·파·마늘잎을 먹이로 넣어주곤 재빨리 흙을 덮었다. 후유~ 무서워서 혼났네.’ ‘6월 16일. 아직 먹다 남은 게 있어 먹이를 주지 않았다. 꿈틀꿈틀 서로 뒤엉킨채 흙속으로 숨어들려고 야단법석이다. 제법 많이 자랐다.’(윤은희씨의 ‘지렁이 생태’ 일지 中)
주부 윤은희(38·양천구 신정7동)씨의 집 발코니엔 지렁이가 산다. 정확히 따지면, 지렁이를 키운다.
“놀러온 이웃에게 화분 안에 지렁이가 있다고 말하면 화들짝 놀라요. 하하.”
달포 전, 환경단체인 에코붓다와 양천구의‘지렁이 화분 분양식’ 소식을 접했을 때만해도 윤씨 역시 그랬다. ‘지렁이를 집안에 들여놓다니….’
귀를 솔깃하게 한 것은 ‘음식물 쓰레기 제로 운동’이란 홍보문구였다. 분양 받기 전 '지구 환경의 파수꾼’ 지렁이에 대한 교육을 받으면서 마음이 좀더 열렸다. 예쁜 흙화분도 지렁이에 대한 선입견을 씻어줬다.
질색할 줄 알았던 남편(김종희·44)은 뜻밖에 “지렁이처럼 이롭고 깨끗한 생명체가 어디있냐”며 반겼다. 윤씨를 대신해 아예 먹이 주는 일을 자처하고 나섰다. 그때마다 두 아들에겐 시골에서 자라던 남편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덤으로 갔다.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남편이 먹이를 줄 때면 쪼르르 달려가 카메라를 들이댔
다. 사진 속에서 조금씩 성장해가는 지렁이가 아이들에겐 재밋거리가 됐다. 뚜껑을 열어젖히면 재빨리 흙속으로 도망치는 지렁이의 모습에 온가족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
‘지렁이가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을까’는 기우였다. 지렁이가 들어있는 화분 위에 화초를 심은 화분이 올려져 있어 그럴 염려가 없었던 것. 먹을거리만 떨어지지 않으면 ‘지렁이의 대탈출’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게 윤씨의 귀띔이다. 악취도 사라졌다. 지렁이 배설물의 탈취효과 덕분이다.
분양 받은 붉은줄지렁이는 음식물 쓰레기 처리 능력이 뛰어나다. 채소·과일껍질·파·마늘·상추 등 무엇이든 잘 먹는다. 머리카락과 먼지도 먹어치운다. 윤씨가 먹이로 주는 음식물 찌꺼기는 1주일에 200g정도. 덕분에 쓰레기통에 내다버리던 양이 1/10 가량 줄었다. 아직 미미하지만 앞으로 화분이 4개로 늘면 윤씨네 4인 가족의 웬만한 음식물 찌꺼기는 해결이 가능하다.
지렁이 화분에 묻어둔 음식물은 3~4일이면 사라진다. 대신 흙은 건강한 검은색으로 변한다.
윤씨는 “분양 받을 당시 흙이 딱딱하고 뭉쳐 있었는데 지금은 부드러워졌다”며 “지렁이가 있으면 토양이 좋아진다는 말을 실감한다”고 전했다.
지렁이를 키우면서 또 하나 달라진 점은 음식물 쓰레기 자체를 줄였다는 것. 지렁이의 처리량을 따지다보니 아무래도 음식물 쓰레기 배출에도 신경이 쓰였다.
“지렁이 화분 하나만으로도 음식물 쓰레기줄이기에 일조할 수 있으니 대단하잖아요.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줄 건강한 환경을 위해 주부들이 할 수 있는 작지만 소중한 일이죠. 보슬보슬한 배설물은 화분 거름으로 활용할 수 있다니 일거양득이죠. 키워보세요. 지렁이가 대견해보여요.”
<김은정 기자 hapia@joongang.co.kr >
Tip 지렁이와의 동거
지렁이가 살기 적당한 온도는 15~20℃ 정도다.요즘엔 햇볕이 직접 닿지 않는 서늘한 곳에 두는 것이 좋다. 겨울엔 온도가 20℃ 내외인 거실에 두면 된다. 습도는 60%가 적당하다. 윤씨의 경우 화초에 물을 주면 지렁이가 사는 아래 화분으로 수분이 공급되기 때문에 따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지렁이와 분변토 양이 1000g일 때 먹이는 200~300g 정도가 적당하다. 지렁이는 무한정 번식하지 않는다. 번식으로 인해 공간이 좁아지는 것을 스스로 조절한다.
문의 에코붓다(www.ecobudda.org) 02-587-8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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